명림답부(明臨答夫, 67년~179년)는
고구려의 차대왕·신대왕 시대의 인물로 고구려의 초대 국상(國相)이다.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로 있다가
165년(차대왕 20년)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佰固)를 신대왕으로 옹립했다.
166년(신대왕 2년) 국상에 임명되었고,
패자(沛者) 벼슬을 더해 내외 병마(兵馬)의 통수권과 함께
양맥(梁貊)부락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다.
172년,
한(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왕이 이를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농성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는데,
청야전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결국 한의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였고,
이에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이 공으로 좌원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받았다.
179년 9월 113세의 나이로 죽자 왕이 직접 애도를 표하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지냈다.
-좌원 대첩(坐原大捷)은
고구려 신대왕 8년인 172년,
한나라의 침입에 맞서 명림답부의 지휘 아래 고구려가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172년 11월, 한(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침입에 대비하여 고구려 군은 우물을 메우고,
적군이 주변 들판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없도록 청야 전술을 폈다.
또, 해자를 파고, 고구려 도성 국내성 밖 좌원(坐原)이라 불리는 곳에 여러 방어선을 구축했다.
고구려 군은 요새로 퇴각하여, 적군이 도달할 때까지 그곳을 지켰다.
포위한 지 며칠이 지나, 한나라의 군대는 지칠대로 지쳐 퇴각하기 시작했고,
명림답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한나라 군을 매복 습격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살아 돌아간 자가 없었다고 한다.
생존자나 전투의 여파는 어떠한 중국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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